황병기(黃秉冀)는 1936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재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교 졸업하였다. 중학교 시절인 1951년부터 국립국악원에서 김영윤에게 정악을, 김윤덕·심상건에게 산조를 배우기 시작하고,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가야금으로 전국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을 만큼 천부적 재질을 타고났다. 그가 정악과 산조를 가야금으로 익히던 시기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국악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때인데, 이러한 시기에 중학생의 어린 나이로 국악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가야금을 들고 다닐 수 있었던 것에서 그의 선견적 안목과 깊은 사려, 그리고 국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찾을 수 있다. 그가 가야금을 배운 것은 전통적 도제식 교육의 결과로 보상되는 열매를 따먹겠다는 단순한 이윤..
전인평(全仁平)은 1945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대전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음악에 대한 애정이 깊어갔고, 특히 이 애정이 그로 하여금 작곡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음악에 대한 애정은 애호의 경지를 넘어선 강력한 힘이 내재된 열망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피아노반주와 가곡을 작곡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열망은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3년여의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 입학하여 작곡을 전공하여 1970년 졸업, 대학원에 진학하여 이론전공으로 1972년에 졸업한 후 현재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있다. 전인평의 첫 작품은 (山居)로서 피아노반주로 된 가곡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는 해에 첫 작품의 표제인 를 제목으로 하여 그 동안 써 두었던 ..
이해식(李海植)은 1943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출생, 1962년 전주사범학교를 졸업 후 약 1년 4개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작곡에 뜻을 두어 1965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 입학, 작곡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였다. 그가 재학 당시 공부한 내용이 서양음악에 관한 학습과 훈련을 기본으로 삼았던 관계로 어느 동료보다 앞서 그가 소망한 작곡의 길을 성실하게 닦아 나갔다. 이해식은 4학년 봄, 국립국악원이 주최한 신국악 작품공모에 당선되었으며 가을에는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전국음악 콩쿠르에서 서양음악과 국악 두 부분에 동시 당선되었다. 대학 졸업과 함께 1969년부터 1980년까지 11년간 KBS FM 프로듀서로 재직하게 되는데, 이 기간은 그에게 있어 작곡생활을 이어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그..
이상규(李相奎)는 1944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6년 과정의 국악사 양성소에서 대금을 전공하였다. 국악사 양성소는 국악연주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특수교육기관으로 1955년 설립되었으며, 국악과 서양음악 및 일반 학과목이 그 교육과정이었다. 이상규는 국악사양성소에서 국악에 대한 기초훈련을 쌓았고 당시 작곡가와 지휘자가 거의 없었던 시기에 작곡과 지휘로 활동하면서 국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의 세계를 확장하여 갔다. 그러나 국악의 지식과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음악이라는 더 넓은 예술세계로 내몰게 되었고, 결국 동년배보다 늦게 한양대학교 국악과에 입학, 작곡을 전공하였다. 그의 처녀작인 동시에 대학에 진학하기 전인 1962년의 관현악 과 작곡을 전공한 후의 작품은 다른 사람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이강덕(李康德)은 1928년 종로구 적선동에서 태어나 16세인 1941년 3월 이왕직아악부에서 피리를 전공하였는데, 이 아악부원 양성소의 최후의 졸업생이기도 하다. 당시 양성소는 학생들에게 전공을 선택하게 하였으나 전통음악 전반을 배우게 함으로써 폭 넓은 이해와 기량을 갖추도록 교육하였다. 졸업 후 곧 이왕직아악부 아악수(雅樂手)로서 연주에 참가하였으며, 광복 후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활동하다가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 옮겨 1987년 정년퇴임시까지 악장으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62년 국립국악원이 주최한 5·16 1주년 기념 신국악창작공모에서 로 당선된 이후 많은 관현악곡을 작곡했다. 그의 작품은 몇 편의 중주곡과 실내악곡 외에 관현악편성곡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연주자 교육을 받은 이강덕의 창작 자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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