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대웅(白大雄)은 1943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작곡전공, 대학원에서 이론을 전공하였다. 해병대에 입대하여 군악대장으로 그가 대학에서 심취했던 서양음악을 실연할 기회를 가졌으며, 제대 후 KBS 텔레비젼 프로듀서로 13년간 재직하면서 서양음악에 대한 애착을 심화시켰다. 한편, 프로듀서라는 그의 직업이 오늘의 그에게 작곡가로서의 방향을 제시해 준 모멘트가 되기도 했다. 이때 그가 만난 전문가들은 서양음악과 국악을 공부한 사람들로서 이 중에는 민요·판소리·산조 등 민속악 전문가들이 많았으며, 특히 그로 하여금 국악으로 돌아오도록 영향을 끼친 김명환이라는 북의 대가를 만나게 된다. 백대웅의 사고는 서양음악에서 국악으로 전환되고, 때 맞춰 모교인 서울..
박범훈(朴範薰)은 1948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 초등학교 때부터 Organ을 연주하고 중학교에서 트럼펫을 연주하였다. 고등학교(국악예고)부터 본격적인 국악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인간문화재 지영희선생에게 피리와 이병우선생에게 편곡, 김희조, 김동진선생에게 서양음악을 공부했다. 그 외에도 16명의 인간문화재급 선생님들 밑에서 10여 년에 걸쳐 국악을 공부하였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때에 연주원으로 참가 한국의 전통음악을 세계에 소개하였고, 1972년 일본 삿뽀로동계올림픽, 1974년 독일 뭔헨올림픽 등에 참가하여 연주하였다. 1984년에는 무용극 '도미부인'을 작곡, LA 올림픽 문화행사에 참가, 직접 지휘하였고,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때에는 개막식 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1979년 국악이 아닌 서..
김희조(金熙祚)는 1920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나 매동공립보통학교와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지금의 조흥은행 전신인 한성은행에 입사하였다.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비올라를 배우고 임동혁과 김순남에게 화성법과 대위법, 작곡을 사사받는다. 5년 후 한성은행을 퇴직, 조선전공회사 경리사원으로 입사, 철도국직원 자격으로 조선호텔 실내악부에서 피아노 연주가로 가담,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광복 후 현제명이 조직한 고려 교향악단에 입단, 비올라 주자로 교향악 연주에 참가하며,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계정직 지휘로 김생려, 김천애, 이재옥, 오병도, 오화섭, 이교숙, 전봉곤 등과 실내악 연주에 가담, 활동한다. 한국전쟁 중 육군에 입대하여 밴드와 브라스 앙상블을 위해 민요를 편곡하고 육군 국악..
김용진(金溶鎭)은 1939년 경상북도 경주군 안강읍에서 출생,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59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가 창설되면서 첫해에 입학하고 국악작곡을 전공한, 체제 교육내에서 작곡을 공부한 첫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한에 국악과를 설립한 것은 국악을 대학교육에 수용함으로써 연주 뿐 아니라 이론의 체계화와 한국음악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작곡분야를 진작시키겨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교육과정에 의한 교과목이 완비된 상태로 개설된 것이 아니었고, 강의하면서 내용을 보충하고, 연구를 거듭하여 교과목을 보완하는 과정을 거치는 상황에서 작곡은 서양음악에 대한 작곡기법을 배우면서 국악작곡을 스스로 탐구 탐색하지 않으면 안될 조건이었다. 서양음악에 의한 작곡가의 훈련은 그에게 음악세계를 확..
김기수(金琪洙)는 1917년 종로구 체부동에서 태어나 1986년 타계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 입학, 5년 동안 대금을 전공하며 전통음악은 물론 신학문과 서양음악의 기초 교육을 받고, 이후 약 6년간 연주와 채보활동을 통해 작곡가로소의 능력을 키웠다. 그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작곡가가 없었던 국악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여 5백여곡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황화만년지곡' 다음 작품인 '세우영(細雨影:1941년)'과 '고향소(顧鄕所:1951년)'가 서정성을 담고 있을 뿐, 거의 궁중음악적 중후감을 띠고 있다. 그의 작품이 궁중음악적 중후감을 띤다는사실은, 그가 그러한 음악적 환경에서 훈련받고 경험했던 것들을 자신의 음악세계에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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